지난 2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였다. 결혼·출산 지원, 보육 확대, 주거 지원, 일·가정 양립 정책 등 다양한 대책이 시행되었지만 기대했던 출산율 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약 400조 원의 재정을 투입했음에도 합계출산율은 0점대로 추락했다. 우리는 이제 ‘저출산 함정(low fertility trap)’이라는 전례 없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노력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처방의 반복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혹시 우리는 ‘원숭이 덫(Monkey Trap)’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좁은 항아리 속 먹이를 움켜쥔 채 손을 놓지 못해 결국 자유를 잃는 원숭이처럼, 익숙한 해법과 기존의 사고방식을 내려놓지 못한 채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인구 문제의 해법을 단순히 “얼마나 많이 낳을 것인가”라는 양(quantity)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질(quality)의 관점으로 확장해 보자는 제안이다. 출생아 수를 늘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태어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창의성과 공감 능력을 갖추며, 급변하는 미래사회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결국 국가의 경쟁력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사람의 역량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로봇공학, 바이오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과거에는 인구 규모 자체가 곧 국력이었다면, 앞으로는 제한된 인구 속에서도 얼마나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가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AI는 노동력 부족의 일부를 보완할 수 있으며, 인간은 기술이 대체하기 어려운 공감, 윤리, 창의, 협력 능력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따라서 미래 사회의 인구정책은 단순한 출산 장려를 넘어, 임신 전 건강관리부터 태아기·영유아기 발달, 교육, 정신건강, 사회적 자본 형성까지 생애 전 주기를 아우르는 ‘인적 자본 투자`의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산과 의사로서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아이들의 탄생을 함께하며 느낀 것은, 한 명의 생명이 지닌 가치가 결코 숫자로 환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 한 명의 건강한 출생은 한 가정의 희망이며, 동시에 국가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출생의 숫자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어떤 역량을 갖춘 시민으로 자라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출산율 증가 정책을 부정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출산율 회복 노력과 함께 인구의 질적 향상을 국가의 핵심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을 담고 있다. 건강한 임신과 출산, 양질의 보육과 교육, 창의성과 인성을 키우는 환경 조성, 미래세대를 위한 사회적 투자 확대는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추구되어야 할 목표이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 속에서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 수준이 높아질 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희생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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